그림책에 담긴 세 가지 언어 1

2025. 3. 3. 06:43심리학

"잘잘잘 1 2 3"이나 "두드려 보아요!" 그리고 제1장 "그림책 세상을 만나다: 감각 발달"에서 다룬 영아기 그림책들은 모두 최소의 서사를 가집니다. 하지만 언어 능력이 발달할수록 아이는 아기 그림책보다 서사가 있는 그림책을 선호하기 시작해요. 이제 다양한 서사가 있는 그림책들과 함께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그림책의 특성 및 언어 발달과의 관련성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발달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그림책에 대한 책이기도 하니까요. 그림책은 글과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각 문학' 장르의 책입니다. 그저 '그림이 있는 애들 책'이라고 여기면 곤란해요. 그림책의 한 장 한 장은 미술 작품이기에 혹자는 '들고 다니는 미술관'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의 서사는 그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전개됩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독자는 글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리고 글과 그림의 주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눈과 귀와 마음을 기울여야 그림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책의 세 언어입니다. 우선, 그림책의 '글 텍스트'는 각 장면의 그림을 이해하는 맥락과 장과 다음 장의 그림을 연결하는 맥락을 제공합니다. 또 그림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안내하여 그림을 읽는 틀을 제공합니다. ('글 없는 그림책'의 경우, 글 텍스트는 없지만 서사가 있기에 '숨겨진 글 텍스트'처럼 작용합니다) 한 장의 그림 안에 다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성격, 미묘한 감정도 들 텍스트로 더 잘 전달할 수 있고, 소리와 움직임을 흉내 낸 말, 인물들 간의 대화 등은 이야기에 생동감을 줍니다. 그림책은 본질적으로 부모가 아이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는 책이기에 글 텍스트는 아이가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짧고 함축적이며 문장 구조도 단순한 편입니다. 이것은 그림이 보여주는 부분까지 글이 중언부언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림책의 글 텍스트를 그 밖의 문학 텍스트와 비교했을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쓰이 다다시'가 말했듯이 "귀로 들어서 알기 쉽고, 즐겁고, 아름답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 귀로 들어서 즐겁고 아름다운 글이란 어떤 것일까요? 바로 운율을 통해서 음악적이고 청각적인 요소가 더해진 글입니다. 예를 들어, 글 텍스트에 의성어, 의태어를 적절히 쓰거나 같은 음절, 단어, 문장을 반복적으로 써서 리듬감을 살리는 것입니다. 「곰 사냥을 떠나자」는 곰을 잡으러 간다는 어느 가족의 유쾌한 노래로 시작됩니다. "곰 잡으러 간단다. 큰 곰 잡으러 간단다. 정말 날씨도 좋구나! 우린 하나도 안 무서워." 이 단락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가족은 풀밭, 강, 진흙탕, 숲, 눈보라 같은 장애물들을 차례로 뚫고 가지요. 특히 장애물을 만나는 흑백 드로잉 장면이 나오면 그다음에는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장면이 컬러로 나오는데, "사각 서걱! 텀벙!", "바스락 부스럭!" 같은 의성어들이 세 번씩 점점 크게 쓰여 있어서 그 또한 리듬감에 기여합니다. 이렇게 '장애물 통과'의 2박자 구조가 반복되다가 마침내 동굴에서 진짜로 곰과 맞닥뜨렸을 때, 2박자 구조는 와르르 무너지고 가족들은 겁에 질린 채 왔던 길을 전속력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때도 의성어들이 빠르게 반복되며 긴박감과 속도감을 더하지요. 이렇게 『곰 사냥을 떠나자」는 단락과 구조, 의성어의 반복, 문장의 앞과 끝에 같은 운의 글자를 사용해 운율을 잘 살렸고, 그림책 한 권이 고스란히 노래처럼 느껴집니다. 필명마저 재미있는 사이다 작가의 『고구마구마』는 언어유희의 요소가 더 강한 그림책입니다. 기다란 덩굴을 쭉 당기니 이런저런 생김새의 고구마들이 주렁주렁 딸려 올라와요. "둥글구먼, 길쭉하구먼, 크구먼, 작구먼" 등등 '-구마'가 각운으로 반복되며 사투리의 재치와 개성 있는 삽화까지 어우러져서 귀로 듣기도 재미있고 읽어주기도 즐거운 그림책이 되었습니다. 그림책의 글 텍스트는 짧지만 까다롭습니다. 그림책 작가와 번역가들이 심사숙고하여 선택하고 다듬은 언어로 짧은 한 줄 한 줄을 촘촘하게 채워 나가지요. 언어 발달의 결정적 시기에 아이는 부모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들으면서 청각적 집중력과 어휘력이 향상되고, 말의 리듬, 높낮이, 끊어 읽기 등 섬세한 언어 기술을 경험하며, 이야기를 이해하는 언어 감각이 길러집니다. 또한 올바른 문법을 익히고, 세련된 모국어의 문학적 감각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의 '그림 텍스트'는 그림의 형태, 선, 색, 절감, 사용한 재료의 특성 등에 메시지를 담아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독자들은 글 테스트를 순차적으로 읽거나 들어서 의미를 이해하지만, 그림 텍스트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글로 쓰면 구구절절 길어질 정보들을 그림으로 한눈에 보여줄 수 있어요. 또, 글 텍스트가 지칭하는 대상과 공간이 그림을 통해 더 구체화하고 명료해지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아직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일수록 그림에 더 잘 집중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 영유아기에는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우뇌가 좌뇌보다 더 먼저 발달하여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또, 부모가 글을 읽어주므로 글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그림에만 기울일 수 있고요. 덕분에 아이는 더 깊이 이야기에 빠져들고 마치 이야기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림을 보며 그 안에 담긴 정보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로 풀어서 생각하는 '언어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그림 역시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읽어내야 하기에 '그림 읽기'라고 말하지요. '팻 허친스'의 『로지의 산 책』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암탉 로지가 산책하러 나갔어요." 이후의 글 텍스트 어디에도 로지에 대한 추가적인 묘사는 없습니다. 독자는 오로지 그림 읽기를 통해서 로지가 전형적인 암탉의 생김새와는 다른 야무진 몸집의 빨간 암탉이며, 고개를 쳐든 채 앞만 보고 씩씩하게 걷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림을 읽는 것도 경험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림은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아요.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가 "어디?"하고 물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귀로 들은 글 텍스트가 언급하는 부분을 그림 텍스트에서 미처 찾지 못했을 때입니다. 그림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림 역시 문자처럼 상징화된 기호입니다. 따라서 글의 '문해력'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읽고 해석하는 '시각적 문해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로지의 산책』을 펼쳐보겠습니다. 이 그림책의 글 텍스트는 로지의 산책 코스만을 이야기해 주는데, 마당, 연못, 마른풀 더미, 풍차 방앗간, 울타리, 벌통을 차례차례 지나가는 로지는 여유롭고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글 텍스트에는 전혀 없는 긴박한 상황이 그림 텍스트에서 펼쳐져요. 여우 한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로지를 뒤쫓지만 매번 헛수고를 하는 겁니다. 현은자 교수에 따르면, 그림책의 글과 그림의 관계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글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림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서로 일치하는 '대응 관계'가 있고, 둘째, 글이 그림을 보충하고 그림이 글을 보완하기에 글과 그림을 모두 고려해서 읽어 나가야 그림책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상호 보완 관계'가 있습니다. 셋째, 글과 그림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굴절 관계인데, 이는 다시 글과 그림이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 '아이러니'와 글과 그림이 다른 관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대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로지의 산책』은 바로 마지막의 대위'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림 텍스트를 읽는 시각적 문해력이 없다면 이 그림책이 주는 재미를 조금도 느낄 수 없을 거예요. 글 텍스트와 그림 텍스트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충돌시켜 긴장과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를 눈치챈 독자 아이들은 로지에게 여우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겠지요. 그림책은 이렇게나 재미있습니다! 아이가 점점 더 많은 그림책을 보고 다양한 그림 텍스트를 경험할수록 더욱 정교한 시각적 문해력이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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