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세계를 넓히는 정보 그림책

2025. 3. 5. 06:41심리학

인지 발달의 정점에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알고자 하는 욕구가 활짝 열린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양질의 정보 그림책을 꼭 읽어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정보 그림책'은 다양한 분야의 사실과 정보를 담은 그림책입니다. '사실'이라는 원자료를 흥미롭게 가공하여 '정보'를 만들고 그 정보가 독자에게 닿아 '지식'이 되지요. 흔히 정보 그림책이라고 하면 어렵거나 지루한 책을 떠올리기 쉬운데, 정보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모든 걸 알려주는 책도, 정보를 가득 담아서 아이의 마음을 압도하는 책도 아닙니다. 훌륭한 정보 그림책의 진짜 목적은 단지 정보와 사실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주는 즐거움, 감동, 경이로움을 전하고, 알고 싶었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며, 몰랐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흥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정보와 사실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의 왼쪽 페이지에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사실 그대로의 글 텍스트가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섬세한 세밀화가 있습니다. 첫 면에는 둥지 속의 알이 보이고, 다음 장면에는 부서진 총알고둥의 껍데기가 보여요. 그리고 글 텍스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단다. 그 사이에만 사는 거지. 우리 주위의 어디에서나 항상 무엇인가는 시작되고 무엇인가는 끝이 나고 있지." 작가는 생명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에 독자의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법칙을 풀도, 새도, 물고기도, 결국 사람도 벗어날 수 없지요. 앞서 설명했던 생물 개념이 이 한 권의 그림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가끔 살아 있는 것들은 앓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지. 대개는 곧 낫지만 너무 많이 다쳐서, 너무 많이 앓아서 더 이상 못 살고 죽기도 한단다. 어려서도, 늙어서도 그사이 어느 때라도 끝이 올 수 있단다." 이 텍스트는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전하는 통찰과 감동은 어떤 만들어진 이야기보다도 깊고 묵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보 그림책에서 픽션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는 건 아닙니다. 정보 그림책에도 허구의 인물이 나타나 꾸며진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합니다. 다만, 픽션에서는 이야기가 메인이지만 정보 그림책에서는 사실이 메인이고 이야기는 표현 수단으로 쓰일 뿐입니다. 『에너지 충전』의 표지에서 붕어빵을 번쩍 들어 올린 귀여운 두 아이는 동생을 놀리는 게 취미인 짓궂은 형 선동이와 순진한 동생 율동이에요. 선동이는 율동이의 어깨에 있는 예방주사 자국을 가리키며 '로봇 자국'이라고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고, 깜박 속아 넘어간 율동이는 로봇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서 온갖 방법들로 에너지 충전을 합니다. 웃음이 절로 나는 귀여운 두 형제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놀랍게도 어느새 다양한 에너지의 종류와 원리를 깨치게 되지요. 이런 사실과 정보는 아마도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서 더욱 흥미롭고 입체적인 방식으로 제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터치 한 번, 클릭 한 번으로 더 많은 배경지식으로 이동할 수 있는 세계는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매력적이지요.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서 아이들이 얻는 정보의 양은 방대할지라도 그 정보가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아이들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지식으로 축적되지 못하는 이유는, 수많은 정보를 충분히 생각하고 처리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에요. 빠른 속도로 새로운 자극을 제시하는 디지털 미디어는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아이를 재촉할 뿐입니다. 그렇게 충분히 반복되지 않은 자극은 머지않아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스냅스의 '가지치기'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알아맞힐 때마다 어른들은 물개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어른들은 이들을 기억력 천재로 여겼지만, 비밀은 '지식'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행 지식이 있는 정보일수록 더 잘 기억하고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어요. 자동차가 가진 속도와 형태, 공룡의 외향과 크기는 아이들에게 아주 매력적이라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흥미 덕분에 자동차와 공룡에 관한 정보들을 더 많이 모으고 그럴수록 지식은 더욱 확장되며 그 결과 점점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비범한 기억력을 보였던 그 꼬마들은 지금은 평범하고 건강한 청년들로 잘 자라 있답니다. 제3장 「더 넓은 세계와 소통하다: 언어 발달」에서도 말했듯이 그림책 읽기는 '머무르는 읽기'이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게 조금도 시급하지 않습니다. '숙달의 욕구'를 가진 아이들은 같은 것을 읽고 또 읽어 달라고 하면서 그 안에서 매번 스스로 새로운 의미와 질서를 찾고, 다양한 차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서로 통합합니다. 어느 순간 아이는 부모가 책장을 넘기기 전에 다음 장에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있게 되고 그때 아이가 느끼는 만족감과 성취감은 비할 데 없이 큽니다. "아라이 마키"의 『튤립』, 『해바라기』, 『민들레』 등 다수의 식물 그림책을 펴낸 작가입니다. 『나팔꽃』은 나팔꽃 씨앗이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떡잎과 본잎이 자라고, 덩굴을 뻗치고, 마침내 꽃이 피고, 다시 씨앗을 맺기까지의 한살이를 순차적으로 보여줍니다. 글 텍스트는 흐트러짐 없이 간결하고 명확하며,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 무엇보다 여백이 많은 그림과 잘 어우러집니다. 책을 읽는 아이는 온갖 식물이나 생태 정보들로 채우지 않은 그림책 속 여백을 생각과 상상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 한 권의 그림책은 흔하디 흔한 나팔꽃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씨앗을 아이의 마음속에 정성 들여 심습니다. 지난 시대 동안 우리의 삶을 규정하던 모든 패러다임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때 부모가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풍요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느긋하게 시행착오를 기다려주며,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격려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인지 발달의 과정에서 아이들 각자가 스스로 만들게 될 생각의 틀'은 '세상을 담는 물'이 되어 평생토록 아이와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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